아침 출근 길, 속도를 내기 딱 좋은 춘향로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죽음을 마주하였다.
내 입을 통해 나온 짧은 탄식 그리고 전주시청 콜센터로의 신고전화 한통.
그뿐이다. 내가 생명이었을 그것에 해줄 수 있었던 것은.
요즘 우린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것이 예전과 다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계절도 겨울에서 봄으로 바꿔었고 시간도 넉달이 넘어가고 있다.
올 초부터 전세계 인간들을 두려움으로 빠뜨린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통해 예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생태' 그리고 야생동물과의 '공존'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얼마 전 친구가 그럤다. '저 하늘 좀 봐, 봄 하늘이 저렇게 푸르르 적이 있었나? 인간들이 좀 자중하니까 자연이 회복되네. 결국 인간이 문제였던거였어, 인간이'
친구의 말에 나는 완전히 동감한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황사도 그토록 힘들어했던 미세먼지도 뚝 떨어져 나갔다. 겨우 서너달 사람들이 덜돌아다녔더니 말이다.
황사와 미세먼지만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얼마전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봉쇄에 야생동물들 도시로'. 사슴, 너구리, 여우, 늑대, 퓨마, 사자 등 인간 때문에 제대로 이동하기 힘들었던 동물들이 인적이 끊긴 도시의 거리에 나타나고 있다는 해외뉴스였다. 그들은 인간들이 없는 세상을 어쩌면 모처럼 즐기고 잇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말한다. 코로나19의 근원이 야생동물이다라고. 야생에서 야생동물들 사이에서만 순환되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올 수 잇었던 것은 순전히 인간의 자연파괴와 자본의 이기심 때문이다.
환경론자이자 동물권 활동가인 나는 이번 코로나19에 다른 바램이 있다.
인간인 우리가 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을 이번에 제대로 배우고 실천명을 하자는 것이다.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몰고 온 그 실체의 너머를 제대로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쩌면 그간 다른 동물들이 인간들에의해 당함에 대해 반격하는 듯한 느낌을 갖고 있는 나로선 이번에 제대로 고민하고 우리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지 못하고 사스나 메르스 때처럼 지나가버린다면 어쩌면 우리에겐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얼마전 코로나19 사태는 생태위기를 무시한 인류에 대한 자연의 대응일 가능성에 언급했다. 그는 이번 사태로 생산과 소비를 낮추고 자연에 대해 이해하며 심사숙고할 기회다라고 했다
그러나 도로에 짓뭉개진 생명을 마주하는 오늘 나의 인간을 향한 바람은 헛된 것은 아닐까 두렵다.
우리의 건강과 안녕을 그토록 바라면서도 동물들과 자연에 대해서는 어찌 이리 둔하고 싸나울까?
자신들에게 해도 되지 않는 생명이지만 시끄럽다는 이유로 혹은 보기 실다는 이유로 길고양이 밥주는 사람들에게조차 험한 막막을 쏟아내고 있고, 극약을 그들의 먹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넣고 싸그리 죽어여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신이 힘들다고 작디작은 강아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사람들. 사람살기도 힘들어 졌다며 자신들의 돈벌이가 되었던 동물들의 사료 공급을 제대로 하지 않아 굶어죽인 동물원 사람들. 조금만 천천히 달리면 될 도로에서 생명을 취하는 사람들. 봄이되어 꽃을 찾은 벌을 잡아 자신을 위해 봉침을 놓느라 벌들을 죽이는 사람들. 단지 몸보신을 위해 봄에 깨어나 만끽도 하기전 개구리며 뱀을 취하는 사람들.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고 죽이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
이런 우리는 두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